현진영 – New Dance 2(1992)_흐린 기억 속의 그대|장기자랑 댄스 경연대회의 추억 ❓

예나 지금이나 그렇지만 필자가 진짜 자신 없는 분야가 바로 춤. 춤출 수 있는 춤은 퐁퐁 리듬에 몸을 맡긴 노래방 아저씨 춤뿐(…)트로트도 …)를 좋아해서 가라오케에는 가끔 드나들었는데, 정말 춤은 (몸매이기도 하고) 정말 거리가 멀었다.그런 필자도 인생에 단 한 번, 단 한 사람 앞에서 춤을 춘 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당시 학교에서는 일종의 관행처럼 종무식(?)이랄까, 학년이 끝나는 날 일종의 장기자랑이나 학예회를 반별로 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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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브라리, 일진 등 이른바 노는 학생의(?) 인생 최대 무대는 수학여행 자랑이었고, 이것 하나 때문에 몇 달 동안 연습을 했다. 앞서 말한 ‘학예회’는 반별로 진행했기 때문에 그렇게 무게 있는 행사는 아니었지만, 이것도 이 정도대로 노는 애들 위주로 많이 신경을 쓰고 준비했다.(그때는 반 친구에 60~70명 정도 있어서 반별 행사에서도 꽤 이목이 집중되었었는데…) 행사날이면 다른 반 애들을 못보게 창문을 신문지로 막곤 했다.굳이 왜 그랬는지는…. 당시 수학여행, 학예회 자랑은 모든 행사의 핵심이었고, 거기서 공연되는 곡은 당연히 당대 최고의 인기곡이었다. 머리가 굵어진 5학년, 6학년 때 서태지가 시장을 평정하기 전에…… 좀 놀던 아이들은 뉴키즈 온 더 블록의 히트곡 김완선의 가장무도회, 현진영의 슬픈 마네킹이 주요 레퍼토리였다.박남정이나 소방차는 필자 바로 위의 선배들의 레퍼토리였다.

상당한 연습 끝에 군무를 완전히 베낀 것은 물론 일부 재능 있던 녀석들은 오리지널 안무까지 추가. 이것이 매우 의미 있는 댄서 배출 통로(…)였던 것이 초등학교 선배인 문희준 씨도 수학여행 때 독창적인 안무로 이름을 날리며 이미 지역 스타(송파구 노란 바지)였고, 이런 인지도가 훗날 에이치오티에 데뷔한 계기가 된다.어쨌든 필자 역시 초등학교를 졸업한 시점에서 당시 친했던 동료들 덕분에 삶에도 없던 자랑을 반강제적으로 준비하게 된다. 원래 몸매였기 때문에 함께 무대에 선 네명의 친구들에게 폐를 끼치기만 했지만… 어쨌든 우리 팀은 일진의 힘으로 당당히 1등을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그게 정말 눈물나게 좋아했던 모양이다( ,), 그리고 필자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댄스대회 …를 장식했던 곡이 전설의 레전드 현진영의 흐린 기억 속의 그대였다.​

현진영으로 치면 80년대 후반부터 이태원 나이트를 중심으로 맹아가 터진 국내 댄스 음악의 시조격인 인물. 필자와 비슷하거나 좀 높은 어르신이라면 당시는 그저 폰척과 발라드로 음악계가 양분되던 시절이었다. 이 힘찬 사조는 가왕 조용필이라고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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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것이 태평양을 건너 미국의 모터운 펑키, 힙합, 소울, R&B, 뉴넥스윙 등이 바비 브라운, 뉴키즈 온 더 블록, MC망치 등 슈퍼스타의 출현과 MTV를 비롯한 미디어의 발달에 힘입어 한국에도 주로 나이트(…)를 중심으로 유입되기 시작한다. 음악 말고 춤이 먼저인 거 그리고 그 중심에 박남정, 박철우(Ref의 그다!), 막내급의 현진영 등 1세대 댄서들이 있었다.​

현진영은 80년대 후반 이수만에 의해 발굴된 이른바 SM 사단의 1호 가수로 알려져 있다. 바비 브라운을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한 1집 현진영과 와와에서는 당대까지 낯설었던 랩과 펑키뮤직, 거친 칼군무, 헤드셋 마이크 등을 받아들여 수록곡 슬픈 마네킹이 큰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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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와와 댄서 팀으로 활동했던 구준엽과 강원래, 김성재와 이현도는 훗날 각각 클론과 듀스로 국내 댄스뮤직계의 주축으로 성장하게 된다. 게다가 이런 인프라를 타고 혜성처럼 등장한 팀이 서태지와 아이들. 전설의 레전드 서태지와 아이들 역시 1집 앨범에 한해 현진영이 닦아 놓은 댄스음악의 틀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 그만큼 현 진영의 등장은 하나의 혁신이었던 셈이다.그리고 문제의 92년. 상반기에 데뷔한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는 알아요와 환상 속의 그대들로 차트를 씹어 먹었고 하반기에는 현진영의 디스코그래피 최대 히트곡 흐린 기억 속의 네가 수록된 2집 New Dance 2가 발표된다. 사실상 92년의 가요계는 묘하게 서로의 전성기를 살짝 벗어난 두 공룡 현진영과 서태지가 양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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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 정상급의 춤 실력은 물론 미모, 상당한 노래 실력, X세대의 시작을 알리는 푸드 패션, 엉거주춤으로 불렸던 센세이셔널한 힙합 댄스에 작곡가 이탁의 필생 역작이 어우러져 이뤄낸 흐린 기억 속의 그대는 그야말로 상반기 서태지와 아이들의 인기를 뒤덮을 만큼 대박이다. 사실상 슬픈 마네킹은 알고 있어도 현진영은 몰랐던 아이들도 이 한 곡을 통해 현진영을 당대 최고의 아이돌로 인정하게 된다.

안개빛조명은 하아아아아아에서 시작되는 미려한 인트로, 이어지는 파워풀한 춤과 서태지와 아이들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힙합한 리듬. 후드티와 헤드셋 마이크, 폭이 넓은 바지, 백덤블링까지 엄청난 붐을 일으켰다고 한다.대중적인 인기뿐만 아니라, 이 작품은 국내 댄스 장면에는 그간 음악에 깃들어 있던 폼필을 완전히 제거하고, 매우 세련된 힙합/소울의 감성이 곡으로 침투한다. 언뜻 나쁘게 말하면, 본격적으로 미국의 흑인 음악이 정제 없이 그대로 대중음악에 투영된 시기라고 할까. 요컨대 현진영의 2집은 서태지나 듀스를 뛰어넘어 사실상 국내 첫 완성도 있는 힙합뮤직이라고 불러도 좋을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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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92년의 수학여행은 15개 참가팀 중 1개팀을 제외하고는 모두 흐린 기억 속의 너로 대동단결했으니 그 인기의 정도를 알 수 있다. 훗날 서태지도 듀스도 못한 업적(?) 가요톱텐 골든컵보다 어렵다는 소리를 들었다.또한 이 시점에서 서태지와 현진영이 확립한 국내 댄스뮤직의 일련의 패러다임은 이전 발라드/트로트 중심의 국내 대중음악 장면을 일거에 혁신하고 그 막강한 영향력을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 EDM과 군무로 완성되는 아이돌 중심의 프레임까지 미치고 있기 때문에 실로 이 한 장의 음반이 갖는 가치가 예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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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현 진영의 대중적 인기는 거기까지였던 것 같다. 후속곡 ‘현진영 코지뇽코’까지 멋지게 마무리해 93년 발표한 3집 ‘두근두근 쿵쿵’도 초반 반응이 아주 좋았는데… 그대로 대마초 복용에 따른 구속, 잇단 재기 실패 등… 원인이야 어찌됐든 이후 현진영은 인기 힙합 가수보다는 실력파 재즈 뮤지션의 길을 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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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록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록 브루스 메탈에 뿌리를 둔 하늘 일대나 넥스트, 서태지 정도가 좋았지, 듀스, 에이치오티, 이를 바탕으로 파생된 수많은 아이돌 팝 댄스 그룹. 등등 이른바 흑인 음악에 원류를 둔 뮤지션들과는 지금도 거리가 가깝다. 그런데도 정말 운명에도 없던 현진영과 흐린 기억의 당신 및 허리에 대한 추억은 오히려 나와 가깝지 않았기에 더욱 강렬하고 소중하다. 그냥 지나간 뮤지션으로 회상하기에는 그 추억의 무게가 남다르지만, 다소 엉뚱할 때 전설의 레전드 현진영과 시대의 송가 흐린 기억 속의 그대를 소개해 봤다.​